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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 다시보기 9
중세유럽은 여러 가지로 허약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국왕이 왕국을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운 통치체제로 지역을 장악한 영주들로 분산되었고 주로 영주가 세금을 거두고 군사를 활용하였다. 따라서 왕도 영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통치체제의 허약성은 영주들의 지역을 넘어서는 교육이나 교류가 상당히 제약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교역도 매우 허약하여 상품교환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학문적인 교류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매우 제한적이었고, 기술의 확산도 매우 더딘 상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기술, 생산, 교환, 사상, 제도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이러한 취약한 중세유럽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중세가 끝나자마자 유럽이 계속 진취적인 사상, 과학, 기술발전과 탐험으로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계 최고의 문명지역으로 우뚝 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럽이 대개 1500년 정도에 중세에 벗어났다고 생각하는데 1300~1400년대 중세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이슬람과의 교류를 통해 이슬람의 과학과 사상을 흡수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1500년대 이후에도 적어도 300년간은 동양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흡수하고 나서야 1800년대 이후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이 번 글의 내용과 성격이 다르므로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이 번 글에서는 중세유럽이 얼마나 취약한 모습이었는가에 집중하겠다. 중세 유럽 강세 지역이었던 프랑스, 스페인, 영국이 그 당시의 고려나 조선보다 한참 약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허약한 국가체제
야만족의 지속되는 침략으로 서로마 이후에 수많은 집단들이 서유럽 여기저기서 권력을 장악하다가 쫓겨났다. 지중해는 이슬람에게 정복당해 서유럽은 사분오열된 집단들이 여기저기서 각자의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던 로마의 도로체계가 무너지고, 지중해 교역체계도 무너지고, 야만족의 지속적인 이동과 침략으로 강을 이용한 교역도 매우 힘들어졌다. 교역이 무너지면서 각종 필요물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수로 등 기술수준이 크게 후퇴하면서 필요한 시설들을 재정비할 수 없게 되자 화폐 사용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도시는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도시민들은 도시를 방치하고 사라졌으며 각각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기술, 상품, 지식, 사상, 예술, 제도, 예절도 급격하게 몰락하거나 사라졌다. 그래서 스페인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711년 이슬람에 함락당했고 500년대부터 프랑스에 프랑크 왕국이 있었지만 이미 왕은 자녀들에게 국토를 여기 저기 나누어주어 내부가 분할되고 경쟁하는 상태로 매우 취약하였다. 왕족끼리 싸우고 주교와 싸우고 귀족들이 싸우는 사분오열의 시대였다. 왕은 힘이 부족하여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없었고 각 지역의 세력가나 주교보다 나은 군사력이나 재산을 별로 가지지 못했다. 왕이 영지를 순방할 때는 몇십명이 호위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732년 이슬람군이 프랑크를 공격했을 때 재상인 마텔이 피레네 산맥 남부에서 이슬람을 막아내 카롤링가의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의 손자 샤를마뉴는 800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고 그 후 서유럽을 거의 장악하였다. 그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자신의 권위가 제국 전체에서 행사되도록 힘썼다. 주교와 귀족으로 이루어진 귀족회의를 통해, 지역관리자인 백작들을 임명하고, 순찰사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감시하게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후계 왕들은 이를 확립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행정명령은 대체로 구두로 이루어졌고 또한 통신이나 도로가 엉망이어 명령전달체계가 느렸고, 왕이 자녀에게 국토를 나눠주면서 다시 왕족끼리의 경쟁과 전쟁이 심해졌고, 귀족들의 힘이 강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800년대 중반에서 1000년대 초반까지 바이킹, 바이킹의 후예 노르만, 노르웨이, 덴마크인들의 공격으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파괴되었고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대서양 연안 등이 침탈 또는 점령당했다. 846년 이슬람군은 로마를 약탈하고 프랑스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 온 헝가리족은 900년대 초에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대부분을 초토화하다가 955년 독일 왕 오토에게 패퇴당했다. 각 지역이 영주에 의해 분할 통치되면서 영주들끼리의 침략이 많아졌고 그래서 수십명으로 영지를 지키기 위해 방어가 쉬운 산에 성을 짓고 영주가 그곳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지금도 유럽에 가면 온갖 성들이 산위에 남이 있다.
 영주들이 소수군대로 방어하기 위해 산위에 성을 짓고 그곳에 살았다.
허약한 관료체계
이런 과정을 거쳐 샤를마뉴가 임명했던 백작들은 점차 독립해 거의 독립적인 영주가 되었고 아니면 침략을 통해 강자가 지역통치자가 되었다. 전쟁 등으로 지역통치자들은 쉽게 바뀔 수 있었다. 오토왕조가 등장하면서 왕권을 인정하지만 독립적인 영주의 힘은 이미 강화된 형태였다. 따라서 지역 강자를 영주로 임명하고 봉토를 주는 형식을 거치지만 대개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이 직접 통치제제를 갖출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상당 부분 명목상 황제였다. 각 영주들이나 황제나 자신의 영역을 총괄하는 정도의 적은 숫자의 관료를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영주들에게 유사시 기사를 보내도록 하지만 그 수자가 크지 못했다. 영주들은 기사들에게 일정한 봉토를 주어 마을을 다스리고 유사시 전쟁에 나오도록 하였다. 십자군도 영주들과 기사들의 참여를 받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한 것이라 중앙의 전쟁통솔력이 매우 약했다. 따라서 기사나 영주가 각자 자기의 지역을 관할하는 소규모 분할통치 체계가 정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황제나 영주의 관료는 가까운 귀족들이 차지하였고 이들은 전문적으로 행정을 위하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제도를 시행한 적이 없다. 그래서 중세의 관료체제는 매우 허약할 뿐만 아니라 능력도 매우 부족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중세말기에 이르러서야 대학이 확산되고 대학으로부터 교육받은 사람들을 관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생 중에는 그 당시 가장 뛰어난 학문도시로 알려진 스페인의 이슬람 지배지역인 톨레도에 유학을 가기도 했다. 영주, 기사, 관료들 중에 문맹이 많았다. 라틴어로 문자를 사용하고 말은 자기 지역 말로 하니 문자의 필요성이 그만큼 적었다. 영주나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전투능력이나 궁중예절이나 경영능력으로 생각했다. 이에 비해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하는 주교들이나 사제들은 문자를 아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영주들은 문자를 읽을 필요가 생기면 사제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왕이나 영주는 자신의 영역, 토지, 농노들을 사적인 재산처럼 다루었다. 각 영지에서 영주들이 거의 마음대로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결혼식 전날에 신부가 영주에게 처녀성을 바치도록 만든 영주도 있었다. 많은 영주들은 야만적인 착취 그리고 교회가 면죄부판매를 통해 신성질서에 균열을 일으켜 결국 농민들의 분노를 샀고, 영주와 결합되어 있는 카톨릭에 반대하는 16세기의 종교혁명에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농민전쟁은 중세를 크게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왕, 영주, 기사들이 농노를 사적으로 지배하여 공사가 아주 불분명한 사람들이었다. 루이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통해 공사의 구분이 미약한 유럽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유교권에서는 백성이 국가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서유럽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없었다. 중세 이후에도 프랑스는 제한적인 하부 구조에다 재정분야의 관료만을 둔 나약한 중앙집권 국가였을 뿐이었다. 약 1800년에도 인구에 대한 관료의 비율은 1400대1에 불과했다 (홉슨 2005:358, 서양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약한 관료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허술한 군사체계
로마가 무너지면서 보병이 득세하였으나, 샤를마뉴가 보병과 기병을 혼합하여 사용하여 서유럽을 거의 장악하였다. 중무장한 기병 덕에 샤를마뉴는 다른 지역의 보병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인 오토1세도 기병을 사용하여 기병대인 헝가리족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기병은 가장 핵심적인 서유럽의 군사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말과 장비가 비쌌기 때문에 로마에서처럼 돈 있는 귀족들이나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또는 왕이나 영주가 기사에게 군역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일정한 봉토를 떼어주었다. 왕이나 영주는 필요할 때 이들 기사를 호출하여 전쟁에 출정하는 식이었다. 중세에는 왕이라고 해봐야 많아야 몇 천 명의 군사를 동원한다. 이것도 영주들에게 호출해야 가능하다. 교통통신 체계가 미약하고 영주의 힘이 강해져서 왕이 직접 지배나 직접 세금수취가 불가능하여 연합세력의 우두머리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영국왕 헨리 2세가 1171년 아일랜드를 침공할 때 그의 군대는 기사 500명과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궁수였다. 1335년에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도 3200명이었다. 백년전쟁(1337년-1453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였던 아쟁쿠르 전투(1415년)에서 영국군 전사는 2600명에 불과했다. 필립 4세의 휘하의 한 영주의 군대는 기사 5명, 병졸 20명, 종군 신부 한 명, 하인 61명, 하녀 한 명, 그리고 말 84마리였는데 이는 평균적인 영주의 군대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는 아주 원시적인 초기 국가형성 단계에 나타났던 형태다 (고구려 유리왕의 드라마 <바람의 왕국>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왕권이다. 제가회의의 승인을 거쳐야 제가들이 군대를 동원해 왕을 도와주는 식이었다.) 기사들은 봉토(장원- 보통 마을 하나 정도 됨)에서 농노들로부터 조세와 노역을 받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위는 점차 상속되었기 때문에 특정 계급이 되었다. 그리고 기사는 단순히 갑옷을 입고 창과 말을 타고 싸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을 지배자로서의 신분을 의미했다. 그리고 마치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기사도인 것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기사도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고 그런 한에서 농노나 농민보다 행동과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했다. 중국이나 조선의 호족이나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일부 기사는 악랄하게 농노를 착취하였다. 기사도라는 이미지는 농노와의 차별화로 실제보다 과장된 자기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행동은 이래야 한다고 믿었듯이 (兩班道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양반의 행동거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기사도는 기사는 행동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용이지 실제의 행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의 기사
허술한 교역체계
로마의 몰락 이후 로마의 원활한 교통체계가 무너졌다. 파발 체계가 거의 붕괴되었고 중세에 이를 복구할만한 힘을 왕이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일일이 지방을 돌아다녀야 권위를 세우고 지방통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러다 보니 지방의 영주의 힘이 세졌고 영주를 넘어서는 교역이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지중해의 원거리 교역은 거의 중단되었다 화폐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어 상거래에서 물물교환이 주도적인 형태가 되었다. 상인들도 이러한 험난한 길을 따라 산을 넘고 때로는 강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행상이었다. 즉, 장돌뱅이였다. 따라서 육지의 길보다 강을 많이 이용하였다. 배를 타고 강을 이용하면 육지보다 2-3배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상품을 싣고 이동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강을 중심으로 교역 그리고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차 바다를 이용한 교역이 복구되면서 중세 후반에서야 해안 도시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교역로는 유럽과 이슬람 지배하의 스페인을 잇는 길, 그리고 이슬람 그리고 비잔틴을 유럽으로 잇는 다뉴브강 그리고 라인강이었다. 센느강, 테임즈강을 통해 파리와 런던으로 이어지는 교역도 후반으로 갈수록 활발해졌다. 물론 농노나 농민들도 자신의 농경지에서 거둔 농산물이나 가내 생산물을 도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또한 특산물, 무기, 보석류 등이 내륙의 시장을 통해 공급되었다. 특히 수도원은 광범위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유럽 전역에서 수도원을 오가며 서로 사상, 지식, 책을 교류하는 일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중세의 상업, 교역, 교류가 로마 시대에 비하여 크게 후퇴하였으며, 극소수의 교역로만이 활성화되었지만 그 내용이 상당히 빈약하여, 유럽은 그 당시의 이슬람, 인도, 동아시아 지역에 비하여 교역이 크게 낙후된 상태를 보여주었다.
열린전북 [2008년12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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